Eisenhart2015. 8. 19. 21:08




그는 은빛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상상에 빠진다. 서늘한 총신이 가슴에, 관자놀이에 닿는 감각은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이가 겪는 환상통처럼 분명하고 또 헛되었다. 차라리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차마 잊지 못해 간혹 감당치 못하고 울곤 하는 기억을 깔끔하게 지운 채 편안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는 것처럼. '머릿속에 표백제를 들이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는 간혹 마탄으로 산 자의 숨을 끊어야 했다. 그럴 때 제라드 아이젠하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미려하게 웃는다.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같다 착각할 만큼 순진하고, 혹은 마치 죽음에 한 발을 깊게 담근 사람처럼 초연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손놀림은 간결하게. 죽음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까뒤집고 넋을 놓은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남자는 튀긴 피를 닦아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선수들을 서포트하겠다는 역할을 자청하기 이전, 용병으로 살던 때의 일이다. 히스토릭 서비스에 입사하면서 담배는 끊었다.



제라드 아이젠하르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마더랜드에서 3년을 살았다. 고의는 아니었다. 우연은 태풍처럼 진로를 틀어 대륙에 그림자의 비를 뿌렸고, 그 소용돌이에 자신이 휘말렸을 뿐이었다. 제라드는 다 쓴 탄피를 주머니 속에 넣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고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피하는 대신 호기심에 끌려 다가갔을 뿐이었다. 처음엔 모든 게 감탄스러웠다.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얇은 튜닉을 입은 쭉 뻗은 미녀들이나, 본 적 없는 문양-그것들은 대개 동물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이 자랑스레 박힌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군대를 지나가듯 보며, 내가 그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왕이 될 수도 있을까 큭큭 웃으며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삼류 소설 속에 살지 않았고, 주인공마저도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중의 만찬같은 것은 잊게 되었다. 지나칠만큼 화려한 버섯을 지나칠지 혹은 이것으로 배를 채워야 할지 고민해야 했고, 늘상 아이젠하르트의 집안에서 도련님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동안 몸에 배어있던 말쑥함은 고작 며칠만에 부스러져 없어졌다. 자신이 살던 땅과는 미터나 인치같은 폭의 개념으로 환산할 수 없을만큼 아득히 멀어졌다는 사실이 어깨를 짓눌렀다.



자켓 안 쪽에 숨은 탄환은 전부 맞추었을 때 스물 네명의 사람을 창조주 곁으로 보낼 수 있었고, 늘 품에 쥐고 있는 총은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나를 찾아내지 않을까. 겨울이 다가올 수록 제라드는 깨달았다. 판타지는 없다고. 허기에 배를 곪아 끙끙거리고 용기라 포장한 수치를 숨기며 마을의 불켜진 문을 두드리고, 박대당했다. 그는 이 이름 모를 대륙이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 땅임을 알았다. 이후 그가 차원문을 완성해 아라라트로 돌아간 이후 자신이 2년을 머물렀던 대륙의 이름이 마더랜드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코웃음친 이유이기도 했다. 장전되지 않은 총을 만지작거리다 뒤집자 총구를 따라 길쭉하게 붉게 음각된 글씨가 보였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결과가 있다면 아무래도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마을 뒷편의 산쪽으로 난 길에는 무성하게 자란 덤불숲이 있었다. 수풀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마다 발목이 무언가에 찔린 듯 시큰거리고 아팠지만 모든 것이 무디게만 느껴졌다. 총을 입술 위에 가져다대었을 때만 해도 그는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입이 열리고 마른 입 안과 혀가 총구를 받아들일 때에도 그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웃었다.


그러나 사위는 발포음 없이 고요했다.


방아쇠를 당겼던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행복해질 줄 알았다. 장전까지 마쳤지만 미처 탄환을 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검지 손가락은 방아쇠를 누른 채 떨고 있었다. 입 안을 메운 이물감을 뱉어내며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총을 바닥에 던졌다. 벌린 턱이 뻑뻑했고 볼이 금방이라도 찢어질듯 아팠다. 제라드는 한참을 헛구역질하며 젖은 흙바닥에 듬성자란 잔디를 쥐고 쿨럭거렸다. 장기까지 게워낼 듯 한참을 기침하고서야 그는 자신이 날카로운 가시덤불 숲에 와있음을 알았다. 자켓 안 쪽에서 스물 네 개의 탄피가 후드득 피처럼 쏟아졌다. 누군갈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그랬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듯한 침엽수의 첨예한 잎사귀 끝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잔디의 뾰죽한 말단이, 어둠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기괴한 가시의 덩쿨들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 정신을 잃었다.


뻔뻔하고 유능했으며 다소 자만감에 차있었던 아이젠하르트 가문의 남자는 여전히 아라라트를 투명하게 헤메고, 마더랜드에서 돌아온 그의 그림자는 투명한 궤적을 쫓아 달리는 위성처럼 발자국을 밟는다. 그림자에 먹혀 먼 곳을 방랑하다 돌아온 제라드는 여전히 제라드이되, 예전과 같다 말하기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자만감은 까맣게 잊었고 나사 하나를 잃어버린 듯 이상하게 느긋해하는 경향이 늘었다. 그리고 방랑하는 세월동안 대륙에서 배워온 신비한 술수를, 남자는 용병 일을 하거나 제 마탄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를 향해 괜찮느냐 물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느냐고도 물었다. '그 때의 내 얼굴이 겹쳐보여서요.' 아이젠하르트들은 수수께끼가 아닌가 싶어 그를 줄곧 감시하고 여러차례 그 말의 뜻을 물었지만 제라드는 답하지 않았고, 모두가 지나가는 말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제라드는 박스 하나를 가득 메운 강화탄을 손에 쥐었다. 후드득, 손가락 사이로 탄환들이 빠져나갔다. 이 탄환에 맞는 자는 기억을 잃는다. 머릿속에 표백제가 들어찬듯 화이트아웃된다. 진정 그럴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 탄에 죽었던 이들이 전부 흰자를 드러내며 목숨을 잃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새까맣게 변한대도 상관없겠지. 남자는 느긋하게 쿡쿡 웃으며 남은 탄환 하나를 두 손가락으로 쥐고 길쭉한 선을 눈으로 훑었다. 날카로운 원뿔처럼 깎인 선단을 가만히 응시하려하다, 포기하고 시선을 거둔다. 힘이 빠진 손에서 탄환이 미끄러져내려 박스 안으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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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osaly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