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괴물들이 스노우딘의 혹한을 두려워해 차마 폐허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고, 털이 긴 수인들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것이라곤 마을에 퍼진 알량한 온정 뿐인 순간을 가끔 견디기 어려워할 적도 있었다. 그들은 쉽게 사랑했고, 그들은 쉽게 잊었고, 그들은 애써 웃어야 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선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따뜻한 요리를 먹으며 든든하게 속을 덥히고, 순식간에 몸속에서 소화되는 감각을 느끼며 호탕하게 웃는 게 괴물들이 생각하는 쉽고 현명한 방법이었다. 사막을 사는 목마른 방랑자가 오아시스를 사랑하듯, 긴 겨울 뿐인 스노우딘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 고소한 기름 냄새, 공기 중을 분분히 떠도는 알코올 향과 더불어 샌즈가 그릴비의 식당을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샌즈는 유독 표정을 읽는 일에 능했다. 거나하게 취한 새 형태의 손님이 통역이 필요하면 말하라며 가슴을 펴고 으레 과장한 폼새로 조잘거릴 적에도 샌즈는 nope, 하고 간결하게 거절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허리를 구부정히 숙이고 반쯤 엎드린 채 느긋하게 웃고 있으면, 불그스름하게 타는 불꽃 안에 잠긴 시선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잔을 닦는 손놀림은 멈추지 않는 채로. 샌즈는 그릴비의 표정을 단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었다. 핫한 표정이야. 안 그래, 그릴비?
“형은 내가 보기에 그릴비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파피루스의 말에 샌즈가 슬리퍼를 끌던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지하세계는 낮과 밤의 경계가 엷었다. 분명한 낮인가 싶어도 어느덧 사위가 천천히 어둠에 잠기는게 느껴졌고, 밤 역시 낮의 꿈으로 느껴질만큼 몽롱했다. 불이 꺼진 식당 문을 등지고 나란히 걷던 두 해골은 멍뎅그레 서로를 바라보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샌즈였다.
“그래?”
“형은 항상 보초를 땡땡이치고 그곳에 살다시피 하잖아?”
“그렇지.”
“또 항상 그릴비에게만 말을 걸어!!!”
“그렇지.”
“그리고... 그리고... 내 스파게티를 먹는 것보다, 그 기름에 잔뜩 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더 맛있게 먹는다고!!!”
“그래?”
“맞아. 사랑. 도서관의 데이트 교본이 그랬다고. 녜헤헤.”
그릴비즈에서의 순간은 언뜻 들으면 지루하다 느껴질 만큼, 늘상 똑같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과 알코올 향, 일과를 끝내고 소리높여 떠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릴비. 도발처럼 툭 던지는 말에도 그릴비는 좀체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샌즈는 항상 사소한 말장난이나 농담들을 그릴비를 향해 툭툭 던지고, 그릴비는 골대처럼 반응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길게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담담히 식기를 닦는다. 바 위의 유리잔과 쟁반들, 식은 감자튀김과 케찹이 코트처럼 늘어져있고, 작은 해골은 혀로 농구 연습을 하는 마냥 눈 앞의 바텐더를 향해 쉼없이 농담 모양의 공을 던진다.
내 동생이 신경쓰지 않는 척해도 다 알고 있었다니깐. 내 동생은 역시 끝내줘.
샌즈는 씩 웃었다. 항상 웃고 있었으니깐.
파피루스의 말은 거의 맞았지만 실은 거의 틀렸다. 그릴비의 요리가 파피루스의 스파게티보다 더 맛있는 건 사실이고, 사랑에 빠졌단 사실은 샌즈 자신조차도 확언하기 어려웠다. 통역의 제안을 거절하듯 단번에 nope. 하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만일 그가 사랑에 빠졌다면.
“파피루스.”
분홍색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걷던 샌즈가 발을 멈췄다. 뽀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걷던 파피루스가 그를 돌아봤다.
“왜?”
“내가 정말 그릴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형은 그럼 그 불타는 괴물 바텐더랑 데이트할 생각, 해본 적 없어?”
샌즈는 눈을 내려 발등을 바라봤다. 스키를 타는 마냥 죽죽 걷는 걸음걸이 때문에 슬리퍼의 발등이 진한 철쭉 색깔로 젖어 있었다. 발가락 뼈를 타고 서린 냉기가 선명했다. 그냥 ‘바로’ 집으로 갈 걸 그랬나. 하지만 소중한 동생과 함께 하는 귀갓길은 포기할 수 없었다. 샌즈는 최대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바로 옆의 파피루스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기대하는 얼굴을 짓고 있었으니깐.
“어. 없어.”
“그럼 사랑하지 않는거야?”
파피루스는 항상 돌직구를 던진다. 샌즈라도 하나뿐인 동생의 말에는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모르겠는데.”
샌즈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소중한 동생은 어떻게든 형의 사랑에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건지, 울망거림과 초조함이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발을 굴렀다. 샌즈는 눈을 감고 그냥 웃어버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무성한 나무숲, 닫힌 건물들, 이글루 모양의 터널 앞을 지났다. 오늘따라 유난스레 발이 무거웠다.
“샌즈! 형은 항상 종잡을 수가 없다니깐!”
“...여하튼, 내가 그릴비와 데이트할 마음이 없는 건 맞아.”
“왜?”
샌즈는 진작부터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말해주어야 하는지 한참동안 고민했다. 우뚝 선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밟힌 눈이 슬리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게 느껴졌다. 어쩐지 발이 무겁더라니. 샌즈는 반쯤 눈을 뜨고 고개를 떨군 채 슬리퍼의 눈뭉치를 떨어내려 발을 털었다. 스노우딘의 길은 어딜 가나 눈이 쌓여 있었다. 연분홍색 슬리퍼에 눈가루가 잔뜩 달라붙어 하얀색처럼 보였다. 발을 털어내길 멈추고 샌즈는 후드 주머니 안에 양손을 푹 찔러넣었다. 늘 넣고 다니던 머리빗이 없었다. 방 열쇠는 잘 있는데, 바에 놓고 왔나? 내일 가져와야겠네. 중얼거리기 무섭게 바로 뒤쪽까지 파피루스가 다가와 있는게 느껴졌다.
“그럴 생각을 하기도 전부터 체념했거든.”
감정을 숨기는 건 더 이상 일도 아니었다. 짓궂게 농담하고, 항상 볼까지 올라온 웃는 상으로, 매사를 귀찮아하고 게으른 체하고. 잠궈둔 방문 안에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파편들이 벗어놓은 양말 무더기처럼 회오리치고 풀 수조차 없는 종이뭉치처럼 꽉 뭉쳐 있었다. 그 안에서 샌즈는 웅크려 잠이 들곤 했다. 샌즈가 던진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파피루스가 뒤편에서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날의 단어 퍼즐을 풀 때 끙끙대는 소리랑 똑같은데. 샌즈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게 가능해???”
“생각하는 것마저 귀찮아하면 일도 아니지 뭐.”
“샌즈! 형은 정말 부지런하게 살 필요가 있겠어!”
하얗게 굳은 슬리퍼에 신경이 쓰여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집 앞이었다. 파피루스는 투덜대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 눈은 털고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샌즈는 눈을 감고, 눈이 잔뜩 묻은 슬리퍼를 벗어 문 앞에 내려두었다. 샌즈는 눈을 감았다 느리게 뜨며 스노딘의 숲을 바라보았다. 얼마만큼의 밤까지 도달한건지, 그릴비의 집을 떠나올 때보다 더 어두워진 듯했다. 지하는 항상 지상의 시간을 쫓으려 애쓰지. 제 생각을 격언처럼 중얼거리며 샌즈는 파란 후드의 주머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손 안에서 굴렸다. 열쇠가 푸른 안광을 받아 순간 번뜩였다. 시간선은 항상 제 변덕대로 움직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흘렀던 낮과 밤의 농담濃淡이 역류하며, 제자리 아닌 제자리로 돌아오는게 두려웠으니깐. 그냥 포기해. 난 그렇게 했어. 샌즈는 자조하듯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샌즈.”
순간 들려오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에 샌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실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등 뒤로 짙고 깊은 그림자가 지고 있었으니깐. 샌즈는 눈을 들어 그릴비를 바라봤다.
“그 표정...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맞지?”
샌즈는 최대한 괜찮은 듯 웃어보이며 한쪽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슬리퍼를 벗은 맨발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장갑을 낀 그릴비의 손이 보였다. 하얀 머리빗이 손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걸 놓고 가셨습니다.”
“헤. 고마워.”
샌즈는 눈매를 휘어 둥글게 웃곤, 손을 내밀어 빗을 건네받았다. 더운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그릴비는 꽤나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의 보폭만큼 발자취가 녹아 어둠 속에서도 그 윤곽이 선명했다. 무더운 열기가 천천히 슬리퍼에 묻은 눈을 녹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샌즈는 한 손에 찔러넣고 있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부짖고 노력했던 사투 끝에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리셋된다 해도, 체념 이후의 후회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자신 역시 썩 괜찮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있잖아. 그릴비. 나도 줄 게 있는데.”
샌즈는 천천히 웃으며, 방 열쇠를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릴비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 샌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표정이 상당히 보기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그동안 그를 향해 날렸던 말들보다 더 진중하게, 마치 덩크를 날리듯.
“그냥, 나도 시도라는 걸 해볼까 하고...”
“.......”
“뭐, 내 방 열쇠야.”
“.......”
“네가 가져도 돼. ...뭐, 찾아와도 좋고, 책임질 생각이 없으면 버려도 돼.”
최대한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머리 위로 땀이 맺히는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괜사리 머쓱해져 픽 웃어버리곤 샌즈는 손을 뻗어 작게 이마를 짚었다. 작게 이글거리는 불길이 자신의 표정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을 걸 생각하니 머쓱해 참을 수 없었다. 양 손을 후드 주머니에 꽂고 문을 열어 들어가려는 순간, 뒤편에서 나지막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직하겠습니다.”
“...오. 젠장.”
유난히 표정을 읽는 일에 능한 샌즈였지만, 자기 자신의 표정만은 들여다볼 수 없었다. 또 그가 뒤를 돌아본 동안, 그릴비가 자신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한 채였다. 본능적으로 작게 탄성을 뱉으며, 샌즈는 그 자리에서 제 방 안으로 이동했다. 창문 바깥에서 그릴비가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손 안의 열쇠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백한거구나!!! 우리 형이!!! 드디어 사랑한다고 말한거야!!!” 파피루스의 외침이 워터폴과 핫랜드까지 들릴 만큼 2층의 복도를 뛰어달리는 소리가 들려 샌즈는 문을 잠그고 무릎에 얼굴을 괴어 묻었다. 온갖 민망함이 자신의 등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지만, 한 가지 감정만은 확고했다. 만족스러움. 의지를 쥐고 있는 누군가가 정해진 결말에 만족하기를, 그래서 이 순간이 영원히 리셋되지 않기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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