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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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esert/Short2016. 2. 20. 21:01



1

 식당의 쇼윈도에는 CLOSED라 적힌 정갈한 손글씨의 팻말이 걸려 있었다. 창백한 낯의 남자가 문을 열고 가게의 한복판으로 들어섰을 때 마지막 잔을 닦던 식당 주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두 다리를 전부 덮는 길이의 새까만 가운이 어둠 속에서 너울거렸다. 마른 헝겊으로 닦아낸 유리컵에선 잔잔한 광택이 돌았고 식당 주인의 손 끝에서 주홍과 옅은 노란 빛이 타올라 잔 위를 비췄다.

 

 소란은 항상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만 지속되는 법이었고, 모두가 떠난 식당은 적막했다. 불타는 몸을 한 식당 주인은 홀로 혼잣말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자신만이 떠들곤 하는 그 순간을 소란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소란은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지만,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고 전해지지 않는 말들은 연기처럼 허공에 머물렀다 가는게 고작이다. 말들 속에 남은 뼈를 의미란 이름으로, 전하고 싶었던 뜻들을 남은 재와 매캐한 향내를 맡듯 조용히 곱씹는 건 그릴비뿐이다. 마감시가 지난 뒤 찾아온 손님은 불청객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릴비의 혼잣말이 지나고 난 뒤의 고요를 조용히 엿듣듯 두 손을 모으고 뜻모를 웃음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대접하고 더 머무르도록 배려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릴비는 잔을 내려놓고, 오래 쥐고 있어 체온처럼 뜨끈해진 마른 헝겊도 바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긍정도 부정도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표현이었다. 새까맣게 젖은 눈동자는 얼굴을 거의 잡아먹을 만치 큼지막했고 검은 눈물이 흘러내린 듯한 흔적이 한쪽 뺨 위로 새겨져 있었으며 반대 쪽에는 그 울음을 뒤집은 것처럼 창백한 낯에 분명한 균열같은 것이 이마 위로 나 있었고, 앞으로 모은 두 손등의 정중앙은 원벽한 원 모양으로 뚫린 채였다. 손가락의 관절뼈와 마른 모양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샌즈나 그의 동생과 같은 해골일지도 몰랐다. 그릴비는 제 육신의 열기가 긴장에 이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 한 개 반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어 그릴비는 남자의 전신을 잘 바라볼 수 있었다. 남자는 까맣게 웃으며 입을 벌려 무어라 속삭였다. 평범한 괴물들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의 구멍난 손이 함께 움직이고 눈 앞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의 나열들이 지나갔다. 폭탄, 편지 모양, 제각기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모양들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낯선 소리가 되어 귀와 육신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청탁.

 

 그릴비는 본능적으로 잔을 움켜쥐었다.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자여서, 내가 손을 뻗고 말하고 닿으려 해도 그럴 수 있는 몸이 이 시간선에는 존재하지 않아. 관찰자가 자신의 유희를 위해 내 몸을 재조립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아주 잠깐이나마. 다른 시간선에 간섭할 수 있는 때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었지만 그릴비는 가만히 듣는 것을 택했다. 그의 말대로 눈 앞의 남자가 조금씩 허물어가는 모습이 느껴졌다. 남자의 몸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고, 혹은 고장난 TV 화면처럼 일부가 노이즈가 끼고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릴비는 바에서 나와 남자를 들여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릴비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야. 내게는 계속될 일이지. 몇 번이고. 입을 벌려 웃자 새까만 입 안이 들여다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 앞에서, 귓속에서 웅웅대 들렸다. 얼굴의 근 절반을 덮다시피한 눈동자에 집중할수록 곧 온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고 형체를 잃는 착각이 그릴비의 등 뒤를 타고 기는 듯하다.

 

 

1

 우리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연구했지. 세상의 인과를 바꾸는 힘. 그러나 나는 너무도 빠르게 모든 것을 알아버렸어. 결계로 나누어진 인간과 괴물의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돼. 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관찰자가 있고, 우리를 간섭할 수 있는 관찰자의 세상이, 이 세상 바깥에 있단 말이지. 다시 생각해봐. 관찰자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있지. 그가 우리보다 더 고차원의 존재라면? 관찰자들의 뜻이, 인간에게 ‘의지’를 갖게 한 근본이라면? 최초로 이 세상을 창조한 신 역시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 관찰자라면?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에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 대체 무엇일까? 실험당하고 괴로워하는 실험체들의 반응이 아닐까? 의지만으로 몇 번이고 뒤집어지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실험체나 마찬가지인 세상이라네. 결과를 얻기 위해, 혹은 이 실험의 끝을 보기 위해서. 그래서 청탁할 것이 있단 말이지. 매우, 매우, 흥미로운.

 

 기억해. 실험의 주체인 관찰자Observer는 간섭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실험은 그때부터 실험이 아니야.

 남자의 손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검고 흰 편린들이 쏟아져 그릴비의 안으로 흘러들어와, 하얀 심장Heart 모양으로 굳는다.

 

 

 




 

183.

 샌즈. 당신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소리내 부르는 게 조금 어색합니다. 당신 역시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리란 것 역시 믿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저는 기이한 경험을 했기에, 그저 당신께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농담을 하면 저는 기울여 당신의 말을 듣는 역할이었건만, 이제는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입장이 되었군요. 웃고 있습니까?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 했습니다. 거품이 피어오르는 듯 둥근 미소도 본 것 같았습니다.

 

 ...샌즈. 제가 공들여 닦아온 삶이 어떤 이에게는 테이프를 되감듯 쉽고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에게 제 생각을 전부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사실과는 다른 제 독자적인 생각들 말입니다. 당신은 이미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을테니깐요. 세상을 소거할 수 있는 힘, 구원하고, 불러올 수 있는 힘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사태의 배후를 만난 것도 아니거니와, 세상이 여러 차례 ‘리셋’-그의 표현을 빌리자면-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왕실 과학자로 칭했던 그 남자는 제게 알 수 없는 지식들을 남겨주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며칠동안 가게를 닫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스노딘의 책에서 찾고자 했습니다만 저는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다며 사서에게 정중히 거절당했습니다. 몇십번 전의 낡은 시간선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겠죠. 차마 당신에게는 청할 수 없을 것만 같아 파피루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두툼한 퍼즐 풀이 도서와 동화책을 들고 제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를 만난 이후 제가 특별한 힘을 얻지 않는 이상 이 불완전한 인과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기에,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리셋의 횟수를 인지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前) 왕실 과학자를 만난 이후로 리셋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얼만큼 세상이 되돌려지고 없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깐요.

 

 샌즈. 꿈을 자각할 수 있는 통상적인 방법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꿈 일기를 쓰고, 꿈에서 비롯되는 세계의 어긋남에 대해 인지하고, 꿈과 현실이 상충하는 때 바로 깨닫는 것 뿐입니다. 일기를 써도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저는 수십 번이고 되뇌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왕실 과학자가 전해준 것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마도 꿈은 아닐테지만, 이 현실이 몇 번이고 되돌려졌단 사실은 꿈을 자각하는 것과 무척 비슷했습니다. 제가 자각몽을 깨달을 수 있었던 토템은 주크박스였습니다. 왕실 과학자가 제 눈 앞에서 흐려져 사라진 이후 저는 그의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당신에게 줄 케찹을 엎지르기도 했고, 그대에게 말도 없이 식당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화재 대피로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으면 미처 끄지 않은 주크박스에서 반도네온의 탄주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워지는 감각은 죄악보다도 선명했습니다.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생각했지만 갑작스레 기름 냄새가 나는 바 안으로 되돌려져있음을 느꼈을 때, 주크박스 안에 음악을 하나씩 넣기로. 다른 곳에 있다가도 문득 이 곳에 서 있을 수많은 그릴비들과 암묵적으로 약속했고, 혼잣말을 하는 버릇을 버렸습니다. 주크박스는 반도네온의 선율이 주를 이루는 재즈는 피아노 소나타가 되었고,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그로울링이 인상적인 이모코어 음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서 흘러들어왔던 심연에서는 관성이 느껴집니다. 나침반이 자력에 반응하듯 제 안에서 다른 극을 향해 기울어지는게 느껴지면 주크박스의 음악을 하나씩 추가합니다. 음반들은 풍족해지고, 손님들은 하나같이 오늘의 음악이 좋다고 말합니다. 재즈, 피아노 소곡, 이모코어 락이든 똑같은 답을 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샌즈. 이제 전 100번이 넘는 리셋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더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수많은 반복 속에서 당신의 행복이 조각나고,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수백 번은 더 꼬였음을 얼마나 더 알아차리고, 잊고, 또 뒤늦게 깨달았을까요.

 

 눈 앞으로 눈발이 부서져, 불꽃과 만나 순식간에 녹아내립니다.

 

 스노우딘은 늘 똑같습니다. 춥고 고요하고, 밟기 좋은 눈이 쌓여 있습니다. 당신을 눈 앞에 두고도 이런 말을 하다니 어색합니다. 당신 앞에서는 제가 어떤 말을 이야기하던지 혼잣말같아, 혼잣말을 잊은 이후론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죠. 속을 털어놓은 이야기에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크게 소리질렀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허무할 따름이니깐요.

 

 먼 데서 당신 말을 들어주는 높은 산보단 가까운 데서 당신을 둘러싸고 공명하는 동굴이고자 했습니다. 모두가 빠져나간 식당에서, 제 불빛이 오롯이 당신만을 비추고 있을 때. 당신은 처음으로 제 앞에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잊지 않는다고, 잊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주어가 가리키는 것이 없었기에, 저는 그저 당신을 향해 온기를 베푸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으니깐요. 이제는 당신에게,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처연했다고.

 

 

 

 

185.

 샌즈.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주크박스의 곡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영혼이 어딘가를 향해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질때면 주크박스의 음악을 한 곡 더 추가합니다. 음악이라 명하기엔 묘한, 빗소리만을 1시간동안 녹음해놓은 LP판입니다. 당신은 치즈감자튀김을 우물거리다, 레코드판의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동전 한 닢을 넣은 후 가장 마지막에 넣어놓은 음악을 듣습니다. 항상 그랬겠지요. 당신이 제게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손님들은 좋은 음악이라며 장난스레 웃었고, 저는 무표정으로 화답하기로 합니다. 제 말을 마음대로 왜곡하기도 하는 손님의 통역에도 침묵을 지키기로 합니다. 잔을 닦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갑니다. 제 손이 잔을 닦으면, 손은 계속해서 잔을 그을립니다. 그을린 잔을 닦는 동안, 잔을 닦는 손은 계속해서 잔의 다른 면을 까맣게 그을리죠. 세상은 이런 단편적인 반복입니다. 제 세상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 중 하나를 포기하고, 반복적인 것들에 몰두할 때마다 당신은 뭔가를 알아채고 있다는 듯 저를 자세히 바라봅니다. 그러면 저 역시, 안경 너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이 이 곳에 머무는 시간이 전보다 길어지고,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알쏭달쏭한 말들을 팁처럼 건네고 넌지시 떠납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면 당신은 호선을 그리는 눈매로 눈을 감은 채 웃어야 하건만,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제 세상을 관찰하는 그가 세상을 지워주길 바라는 것 뿐입니다. 폭격과 총성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전쟁고아처럼. 소리 없이 울부짖고 멀어버린 귀를 부여잡으면서.





186.

 샌즈. 당신 역시, 이 뒤틀린 인과를 제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뿐인 동생에게 이 세상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다인에게 그것을 죽이라고 애원합니다. 당신은 진실의 연구소 앞에서 들려오는 융합체들의 울부짖음에 몸을 떱니다. 당신은 아스고어를 가로막으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은 폐허의 문을 두드리며 농담 대신 울음을 토로합니다. 모두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위로하고,알겠다고 말한 후, 다음 날 잊어버립니다. 당신은 메아리꽃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메아리꽃이 말한 말을 다른 메아리꽃이 말하고, 작은 말이 수많은 말이 되어 자장처럼 퍼져나갑니다. 둥근 자장은 소란이 되고, 자정을 거친 거대한 백색소음이 되어 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당신은 워터폴의 빗속에서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울기 시작합니다. 빗소리는 메아리꽃의 숫자만큼 복제된 당신의 괴로움 같고, 또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내립니다.

 

 당신은 이런 말을 제 앞에서 한 적 없지만, 세상에는 침묵으로 가릴 수 없는 게 있음을 당신 역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선의 뒤틀린 인과에 관한 어떤 말도 전한 적 없으나, 그대가 저를 향해 던지는 시선 하나하나가 반복되는 동정과 공감임을 압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것조차 놓아버린 후 심판의 길을 택한 그대가 같은 처지의 방랑자를 향해 건네는 몸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에 답해주십시오.

 




187.

 “당신을 사랑합니다. 샌즈.”

 후드가 타들어갔습니다. 재투성이가 되면서도 당신은 즐겁다는 듯 웃습니다. 벗겨진 분홍 슬리퍼가 뒤집어진 채 식당의 바닥을 구르고, 당신은 저를 끌어안으며 가쁜 숨을 내쉽니다.

 




188.

 주크박스에 꽂힌 레코드의 수를 세다 조용히 판을 닫았습니다. 샌즈. 저는 LP의 개수를 세는 것을 체념했습니다. 당신처럼 또 하나 놓아버린 셈입니다. 얼마만큼의 되돌림을 겪어야 모든 것을 놓을 수 있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습니다. 왕실 근위대병과 다른 단골들이 각자의 초소와 집으로 돌아간 이후 당신과 제가 단 둘이 바에 남아있습니다. 정확힌, 당신이 저를 일방적으로 지켜보는 풍경에 가까울 겁니다. 당신은 두 손을 깍지낀 채 그 위로 얼굴을 올려놓고선 절 지긋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겠지만, ...저도 당신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이 피로하진 않습니까?”

 “...무슨 일이야. 그릴비? 네가 먼저 말을 다 걸고.”

 “... ...”

 

 당신은 호박색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든 채 넌지시 웃습니다. 당신이 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 느껴질 때면 차라리 그 과학자의 청탁을 들어선 안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경다리를 손으로 잡아 추켜올리고 고개를 떨군 채 태연히 잔을 닦으려 하는 순간, 푸른 섬광같은 것이 지난 듯한 걸 느꼈습니다. 바에 반쯤 엎드린 채 여유롭게 잔을 흔들고 있던 당신이 바로 제 옆에 서 있었습니다. 어쩐지 애틋한 낯을 하고서.

 

 “... ...”


 저는 늘 그랬듯 침묵합니다. 괴물들의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논리가 있습니다. 과학자를 통해 가장 단편적인 것만을 항상 당신의 주위를 도는 위성처럼 당신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샌즈.”

 

 당신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순간, 당신은 고갤 들어 웃어보입니다. 당신은 늘상 짓는 웃음으로 조금씩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제일 어려운 건 말야, 그릴비...”

 “...”

 “내가 너에게 자꾸 의지하게 된다는 거야.”

 “...”

 “난 파피루스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해. 내 동생도 내 무책임의 일부야. 헌데 네가 요리한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고, 네가 들려주는 음악을 함께 듣고 있어. 난 많은 걸 포기했으면서도, 너만은 무슨 마지막 등불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의지하게 된다는 거야.”

 “...샌즈.”

 “헤, 무슨 일이야?”

 “제게 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데?”

 

 어떤 시간선에서 저는 당신을 안고 타올랐을 것이고, 또 어떤 시간선에서는 당신의 뼈와 이빨을 널름대듯 핥으며 뜨겁게 입맞추었을지도 모릅니다. 팔을 뻗어 하얗고 마른 손을 쥐자 기다렸다는 듯 당신의 손이 제 손바닥을 맞대고 손가락 사이로 엉겨붙듯 깍지를 낍니다. 손마디 하나 반만큼 작은 손을 뜨겁지 않은 체온으로 감아쥐고서 저는 허리를 숙이고 당신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봅니다. 당신의 눈구멍 안의 작고 흰 빛이 저를 응시하다, 곧 까맣게 웃어보입니다. 많은 반복이 진행되는 중에도 세상은 움직이고, 당신을 위협하는 무언가도 천천히 기어올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의 웃는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눈부시네. 가볍게 고개를 으쓱 치켜올린 당신이 제게 물어옵니다.

 

 “있잖아, 그릴비. 한 가지만 먼저 물을게.”

 “...”

 “...오늘은 손만 잡는거야?”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늘은 그저 오늘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의 불로 만들어진 육신 안에서 굳건히 잠들어있을 영혼이 당신을 보는 순간 자꾸만 함께 타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식당의 잔과 술병의 수로도 세아릴 수 없을 만큼 되돌아온 원점의 회귀에도 당신만이 제 구원의 점이 되어 아른하게 빛나고 있을 따름입니다. 구슬이 구르듯 왁자하게 쏟아지는 소란을 몰고 헤어질 때는 썰물처럼 사라지는 당신을.


 이 모든 반복과 반복, 부름과 부름, 구원 아닌 구원, 물흐르듯 중앙을 향해 약진하는 레코드판의 바늘을 성급하게 긁어 가장자리로 옮겨대는 ‘관찰자’의 억센 손길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알고 있어.”


 당신은 제 진심을 마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합니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웃어보이지만 그 얼굴이 유난히도 서글펐습니다. 낮게 깔리는 저음의 육성이 건조합니다.


 “당신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잔인하네.”


 제 몸이 재가 되어 사라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영혼이 알려주는 것은 레코드판의 갯수, 그리고 그 판의 갯수만큼 쓰러진 당신 뿐입니다. 당신이 제게, 제가 당신께 다가가는 이유는 단순한 동병상련일 수도 있으며, 혹은 동족에게 갖는 애착일지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래 전의 제가 당신께 제 진심을 말씀드렸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렇듯, 당신은 다가온 미래의 파멸을 깨달은 예언자처럼 덧없이 행동합니다. 허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노력할게.”


 이 세상의 뒤틀린 순환을 막을 수 없는 저의 입장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냥 잘 했다고만 말해줘.”

 “잘 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189.

 그저 제 세상을 떠난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웃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190.

 샌즈.


 레코드판이 의미없이 쌓여갑니다. 당신이 끝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원망하거나 소리내어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한 터를 잡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도움도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겁습니다. 팻말을 CLOSED로 돌려놓은 후 식당의 문을 잠근 후 당신의 자취를 쫓기로 결심했습니다.


 소원의 방에서 본뜻조차 알지 못할 만큼 뭉개진 음성을 귀기울여 듣다,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메아리꽃을 향해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속삭였습니다. 우산을 높이 든 채 워터폴의 비와 수풀을 건넜고, 전광판이 있는 다리를 건너 핫랜드에 도착했습니다. 비어있는 연구소와 망가진 메타톤의 잔해-금속 몸체에 덩굴이 휘감긴 자국이 분명히 남아 있었습니다-를 목도하고, 작동하지 않는 퍼즐을 건넜고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새로운 집을 지나 마지막 통로에 들어섰을 때, 알현실을 향해 뻗은 통로에서 황금빛 광휘를 등지고 선 당신은 되려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였습니다. 세 번의 종소리가 먼지를 흩뿌리며 우는 곡처럼 울린 그 순간, 여섯 장의 꽃잎을 위협적으로 펼치며 덩굴을 뿌리처럼 펼쳐드는 ‘그것’을 향해 당신이 왼눈에서 푸른 안광을 뿜어냅니다. 꽃의 소름끼치는 비웃음을 면전에서 반박하듯 당신이 웃었고, 통로의 바닥에서 분명한 적의를 품은 뼈들이 가시와 같이 솟아올라 ‘그것’을 향해 달려듭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저지하고자 했고, 당신은 마치 퍼즐을 내듯 뼈다귀를 깔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괴수의 두개골 모양을 한 병기에서 직선형의 광선을 쏘아냅니다. 당신을 향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쓰러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리셋 속에서도 당신이 죽는 모습을 충분히 보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입을 막은 덩굴과 잎사귀 때문에 숨이 막혔습니다. 당신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덩굴에 붙잡힌 두 손목이 순식간에 부서집니다. 순간 선혈이 튀었습니다.

 

 지루해.

 

 당신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동공이 사라진 까만 눈으로 피를 흘리며, 고장난 인형처럼 누워 있습니다. 몸피를 키우며 당신을 위협하던 꽃은 당신의 절반 정도의 몸으로 돌아와서 당신을 굽어보며 히죽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새로운 패턴을 연구해볼 생각은 없는거야? 이젠 익숙할 지경이라구.

 “시도를 왜 해?”

 뭐, 내가 잘 하면 네 친구들 곁으로 보내줄지도 모르잖아. 네 친구 플라위가 널 위해서!

 “다시는 그들을 못 봐.”

 어째서 이런 실실 웃기만 할 줄 아는 병신같은 녀석이 이런 귀찮은 힘을 갖고 있는 거야? 내가 널 백만 조각으로 부숴버리는 꼴을 네 동생과 널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저 멍청한 불꽃 대가리 앞에서 보여주려고? 이 세상의 괴물이 너 혼자 남아서,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는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줄까?

 “그냥 포기해. 나처럼.”

 

 발랄한 체하며 이죽이는 꽃의 얼굴은 분명한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악마가 웃었습니다. 그리고.

 



190.

 샌즈. 제가 수많은 반복을 느끼는 동안 레코드판이 쌓이는 것만을 기억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같이, 시간선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일정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그리고 당신이 피를 흘리며, 제 앞에서 쓰러져 먼지가 되는 횟수.


 “Heh.

 “샌즈. 샌즈.

 “별것 아, 냐 헉. 허억. 오늘은….

 “제발.

 “햄버거에, 케찹 잔뜩 얹어 먹을까. 응?

 

 핏물이 배어나오는 상처를 부여잡은 손이 천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집니다. 푸른 점퍼가, 잘 웃는 얼굴이, 슬리퍼와 정강이뼈가 먼지로 변해 사라집니다. 당신의 몸을 흔들며 의식을 차리길 기도하려 했으나 흔들고 손을 잡을 몸이 없습니다. 장갑을 낀 손에 천천히 뼛가루가 묻어 하얗게 변하고, 곧 스노딘의 눈과 섞여 어느 것이 당신의 잔해인지 구별조차 어렵습니다. 피로 젖은 눈발을 손으로 쥡니다. 제 모습을 기이하게 여길 타인들이 이 곳엔 더 이상 없습니다. 샌즈. 저는 너무도 외롭습니다. 샌즈. 당신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소리내 부르는 게 지금도 어색합니다. 당신이 지금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리란 것 역시 믿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저는 기이한 경험을 했기에, 그저 당신께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농담을 하면 저는 기울여 당신의 말을 듣는 역할이었건만, 이제는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입장이 되었군요. 웃고 있습니까?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 했습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헐렁한 후드와 반바지 차림, 거품이 피어오르는 듯 둥근 미소까지.




191.

“넌 나처럼 되면 안 돼.

“.......

“네가 이 순환을 깨닫는 방식을 알아.

“.......

“그리고 넌 영원히 나를 기다리겠지만, 난 네 앞에서 죽는 꼴만 보이겠지. 응? 내가 몇 번 죽었더라? 기억나?

“.......

“그러니깐 한 마디만 하자면...

“샌즈.

“나를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마. 그릴비. 난 책임질 위인같은건 애초부터 아니었으니깐.




19■.

 그릴비의 발치에서 레코드판이 불탄다. 빗소리를 담은 LP판, 반도네온이 있는 재즈, 이모코어 락, 피아노곡이 쪼그려앉은 그의 손길을 만난 순간 불이 붙어 잿더미로 화한다. 타는 냄새가 독하게, 단 둘만이 남은 실내를 채우고 있다. 190장 가까이 되는 레코드판이 전부 불타는 광경은 마치 실내 안에 작은 모닥불을 들여놓은 듯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레코드판에 붙은 불꽃이 널름거리며 주크박스와 가게의 나무바닥과 벽을 핥듯이 새까맣게 그을린다. 샌즈는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그 광경을 그릴비의 등 뒤에서 지켜보고 선다.


 이대로 불지옥이 되어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지? 무너지는 네 세상 안에서, 너를 껴안고 입맞추면 좋겠는데 너무 귀찮은 일이잖아. 들리지 않을 만큼 그는 낮게 속삭인다. 한쪽 눈에서 일렁이는 푸른 안광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샌즈는 불타는 주크박스를 등진 채 그 자리를 벗어난다. 후드의 팔소매가 젖어 있었다.



 

1.

 샌즈가 그릴비스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늘상처럼 혼자가 아니라 줄무늬 셔츠를 입은 인간 한 명을 데리고 온 채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는 인간에게 샌즈는 헐렁한 농담을 던지다가 감자튀김 두 개를 주문하고, 케찹을 품에서 꺼내 한번에 마신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멈춘다. 파피루스가 봤다면 또다시 시공간 장난을 치는 것이라며 투덜거릴만한 종류의, 그런 것. 그릴비는 잔을 붙든 채 그대로 굳어 있고, 샌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메아리꽃과 노란 꽃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섞어 말한다. 자신이 수 십번 죽였고 자신을 수 십번 죽였던 노란 꽃 이야기를.


 “...뭐, 누가 메아리꽃으로 걔한테 장난치나봐.”


 노란 꽃이 자신의 허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파피루스의 목을 꺾고, 척추를 졸라 부숴버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자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릴비는 그가 포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떠올릴 수 없다.


 “꼬마야. 내가 지금 빈털터리라서 그런데 말야, 돈 좀 대신 내줄래? 10000G면 돼.”


 이상할 만큼 많은 금액은 모든 시간선을 통틀어 샌즈가 그릴비에게 빚진 값이지만, 자각을 포기하고 깊은 꿈의 내핵 속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그릴비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잔을 닦는다. 혼잣말을 포기했던 언젠가처럼 이젠 대화를 포기한 것마냥. 바로 앞에서 바에 앉아 술에 거나하게 취한 괴물이 감자튀김은 식었을 거라며 목소리를 높여 저 대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1.

(주크박스는 고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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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osalynn
In my desert/Short2016. 2. 8. 00:41








수많은 괴물들이 스노우딘의 혹한을 두려워해 차마 폐허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고, 털이 긴 수인들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것이라곤 마을에 퍼진 알량한 온정 뿐인 순간을 가끔 견디기 어려워할 적도 있었다. 그들은 쉽게 사랑했고, 그들은 쉽게 잊었고, 그들은 애써 웃어야 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선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따뜻한 요리를 먹으며 든든하게 속을 덥히고, 순식간에 몸속에서 소화되는 감각을 느끼며 호탕하게 웃는 게 괴물들이 생각하는 쉽고 현명한 방법이었다. 사막을 사는 목마른 방랑자가 오아시스를 사랑하듯, 긴 겨울 뿐인 스노우딘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 고소한 기름 냄새, 공기 중을 분분히 떠도는 알코올 향과 더불어 샌즈가 그릴비의 식당을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샌즈는 유독 표정을 읽는 일에 능했다. 거나하게 취한 새 형태의 손님이 통역이 필요하면 말하라며 가슴을 펴고 으레 과장한 폼새로 조잘거릴 적에도 샌즈는 nope, 하고 간결하게 거절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허리를 구부정히 숙이고 반쯤 엎드린 채 느긋하게 웃고 있으면, 불그스름하게 타는 불꽃 안에 잠긴 시선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잔을 닦는 손놀림은 멈추지 않는 채로.  샌즈는 그릴비의 표정을 단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었다. 핫한 표정이야. 안 그래, 그릴비?


“형은 내가 보기에 그릴비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파피루스의 말에 샌즈가 슬리퍼를 끌던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지하세계는 낮과 밤의 경계가 엷었다. 분명한 낮인가 싶어도 어느덧 사위가 천천히 어둠에 잠기는게 느껴졌고, 밤 역시 낮의 꿈으로 느껴질만큼 몽롱했다. 불이 꺼진 식당 문을 등지고 나란히 걷던 두 해골은 멍뎅그레 서로를 바라보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샌즈였다.


“그래?”

“형은 항상 보초를 땡땡이치고 그곳에 살다시피 하잖아?”

“그렇지.”

“또 항상 그릴비에게만 말을 걸어!!!”

“그렇지.”

“그리고... 그리고... 내 스파게티를 먹는 것보다, 그 기름에 잔뜩 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더 맛있게 먹는다고!!!”

“그래?”

“맞아. 사랑. 도서관의 데이트 교본이 그랬다고. 녜헤헤.”


그릴비즈에서의 순간은 언뜻 들으면 지루하다 느껴질 만큼, 늘상 똑같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과 알코올 향, 일과를 끝내고 소리높여 떠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릴비. 도발처럼 툭 던지는 말에도 그릴비는 좀체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샌즈는 항상 사소한 말장난이나 농담들을 그릴비를 향해 툭툭 던지고, 그릴비는 골대처럼 반응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길게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담담히 식기를 닦는다. 바 위의 유리잔과 쟁반들, 식은 감자튀김과 케찹이 코트처럼 늘어져있고, 작은 해골은 혀로 농구 연습을 하는 마냥 눈 앞의 바텐더를 향해 쉼없이 농담 모양의 공을 던진다. 


내 동생이 신경쓰지 않는 척해도 다 알고 있었다니깐. 내 동생은 역시 끝내줘.

샌즈는 씩 웃었다. 항상 웃고 있었으니깐.


파피루스의 말은 거의 맞았지만 실은 거의 틀렸다. 그릴비의 요리가 파피루스의 스파게티보다 더 맛있는 건 사실이고, 사랑에 빠졌단 사실은 샌즈 자신조차도 확언하기 어려웠다. 통역의 제안을 거절하듯 단번에 nope. 하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만일 그가 사랑에 빠졌다면.


“파피루스.”


분홍색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걷던 샌즈가 발을 멈췄다. 뽀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걷던 파피루스가 그를 돌아봤다.


“왜?”

“내가 정말 그릴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형은 그럼 그 불타는 괴물 바텐더랑 데이트할 생각, 해본 적 없어?”


샌즈는 눈을 내려 발등을 바라봤다. 스키를 타는 마냥 죽죽 걷는 걸음걸이 때문에 슬리퍼의 발등이 진한 철쭉 색깔로 젖어 있었다. 발가락 뼈를 타고 서린 냉기가 선명했다. 그냥 ‘바로’ 집으로 갈 걸 그랬나. 하지만 소중한 동생과 함께 하는 귀갓길은 포기할 수 없었다. 샌즈는 최대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바로 옆의 파피루스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기대하는 얼굴을 짓고 있었으니깐.


“어. 없어.”

“그럼 사랑하지 않는거야?”


파피루스는 항상 돌직구를 던진다. 샌즈라도 하나뿐인 동생의 말에는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모르겠는데.”


샌즈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소중한 동생은 어떻게든 형의 사랑에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건지, 울망거림과 초조함이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발을 굴렀다. 샌즈는 눈을 감고 그냥 웃어버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무성한 나무숲, 닫힌 건물들, 이글루 모양의 터널 앞을 지났다. 오늘따라 유난스레 발이 무거웠다.


“샌즈! 형은 항상 종잡을 수가 없다니깐!”

“...여하튼, 내가 그릴비와 데이트할 마음이 없는 건 맞아.”

“왜?”


샌즈는 진작부터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말해주어야 하는지 한참동안 고민했다. 우뚝 선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밟힌 눈이 슬리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게 느껴졌다. 어쩐지 발이 무겁더라니. 샌즈는 반쯤 눈을 뜨고 고개를 떨군 채 슬리퍼의 눈뭉치를 떨어내려 발을 털었다. 스노우딘의 길은 어딜 가나 눈이 쌓여 있었다. 연분홍색 슬리퍼에 눈가루가 잔뜩 달라붙어 하얀색처럼 보였다. 발을 털어내길 멈추고 샌즈는 후드 주머니 안에 양손을 푹 찔러넣었다. 늘 넣고 다니던 머리빗이 없었다. 방 열쇠는 잘 있는데, 바에 놓고 왔나? 내일 가져와야겠네. 중얼거리기 무섭게 바로 뒤쪽까지 파피루스가 다가와 있는게 느껴졌다.


“그럴 생각을 하기도 전부터 체념했거든.”


감정을 숨기는 건 더 이상 일도 아니었다. 짓궂게 농담하고, 항상 볼까지 올라온 웃는 상으로, 매사를 귀찮아하고 게으른 체하고. 잠궈둔 방문 안에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파편들이 벗어놓은 양말 무더기처럼 회오리치고 풀 수조차 없는 종이뭉치처럼 꽉 뭉쳐 있었다. 그 안에서 샌즈는 웅크려 잠이 들곤 했다. 샌즈가 던진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파피루스가 뒤편에서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날의 단어 퍼즐을 풀 때 끙끙대는 소리랑 똑같은데. 샌즈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게 가능해???”

“생각하는 것마저 귀찮아하면 일도 아니지 뭐.”

“샌즈! 형은 정말 부지런하게 살 필요가 있겠어!”


하얗게 굳은 슬리퍼에 신경이 쓰여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집 앞이었다. 파피루스는 투덜대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 눈은 털고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샌즈는 눈을 감고, 눈이 잔뜩 묻은 슬리퍼를 벗어 문 앞에 내려두었다. 샌즈는 눈을 감았다 느리게 뜨며 스노딘의 숲을 바라보았다. 얼마만큼의 밤까지 도달한건지, 그릴비의 집을 떠나올 때보다 더 어두워진 듯했다. 지하는 항상 지상의 시간을 쫓으려 애쓰지. 제 생각을 격언처럼 중얼거리며 샌즈는 파란 후드의 주머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손 안에서 굴렸다. 열쇠가 푸른 안광을 받아 순간 번뜩였다. 시간선은 항상 제 변덕대로 움직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흘렀던 낮과 밤의 농담濃淡이 역류하며, 제자리 아닌 제자리로 돌아오는게 두려웠으니깐. 그냥 포기해. 난 그렇게 했어. 샌즈는 자조하듯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샌즈.”


순간 들려오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에 샌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실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등 뒤로 짙고 깊은 그림자가 지고 있었으니깐. 샌즈는 눈을 들어 그릴비를 바라봤다.


“그 표정...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맞지?”


샌즈는 최대한 괜찮은 듯 웃어보이며 한쪽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슬리퍼를 벗은 맨발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장갑을 낀 그릴비의 손이 보였다. 하얀 머리빗이 손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걸 놓고 가셨습니다.”

“헤. 고마워.”


샌즈는 눈매를 휘어 둥글게 웃곤, 손을 내밀어 빗을 건네받았다. 더운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그릴비는 꽤나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의 보폭만큼 발자취가 녹아 어둠 속에서도 그 윤곽이 선명했다. 무더운 열기가 천천히 슬리퍼에 묻은 눈을 녹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샌즈는 한 손에 찔러넣고 있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부짖고 노력했던 사투 끝에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리셋된다 해도, 체념 이후의 후회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자신 역시 썩 괜찮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있잖아. 그릴비. 나도 줄 게 있는데.”


샌즈는 천천히 웃으며, 방 열쇠를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릴비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 샌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표정이 상당히 보기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그동안 그를 향해 날렸던 말들보다 더 진중하게, 마치 덩크를 날리듯.


“그냥, 나도 시도라는 걸 해볼까 하고...”

“.......”

“뭐, 내 방 열쇠야.”

“.......”

“네가 가져도 돼. ...뭐, 찾아와도 좋고, 책임질 생각이 없으면 버려도 돼.”


최대한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머리 위로 땀이 맺히는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괜사리 머쓱해져 픽 웃어버리곤 샌즈는 손을 뻗어 작게 이마를 짚었다. 작게 이글거리는 불길이 자신의 표정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을 걸 생각하니 머쓱해 참을 수 없었다. 양 손을 후드 주머니에 꽂고 문을 열어 들어가려는 순간, 뒤편에서 나지막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직하겠습니다.”

“...오. 젠장.”


유난히 표정을 읽는 일에 능한 샌즈였지만, 자기 자신의 표정만은 들여다볼 수 없었다. 또 그가 뒤를 돌아본 동안, 그릴비가 자신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한 채였다. 본능적으로 작게 탄성을 뱉으며, 샌즈는 그 자리에서 제 방 안으로 이동했다. 창문 바깥에서 그릴비가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손 안의 열쇠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백한거구나!!! 우리 형이!!! 드디어 사랑한다고 말한거야!!!” 파피루스의 외침이 워터폴과 핫랜드까지 들릴 만큼 2층의 복도를 뛰어달리는 소리가 들려 샌즈는 문을 잠그고 무릎에 얼굴을 괴어 묻었다. 온갖 민망함이 자신의 등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지만, 한 가지 감정만은 확고했다. 만족스러움. 의지를 쥐고 있는 누군가가 정해진 결말에 만족하기를, 그래서 이 순간이 영원히 리셋되지 않기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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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esert/Short2016. 2. 5. 22:15








발목 깊이까지 잠길 만큼 눈이 쌓였다. 몇 보폭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엇비슷한 키로 자라있는 침엽수의 바늘같이 돋아난 이파리에도 딱 그만큼의 너비만큼 눈이 쌓였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곧 부스러질 하얀 나뭇잎 위로 진녹색 그림자가 진 것 같았다.  새 집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폐허의 괴수들 중 털 많은 금수들과 살집이 두터운 괴물들이 머물러 터를 지은 곳이 곧 마을이 되었고 스노딘이라는 이름을 갖췄다. 어쩌면 있는 건 하얗게 내리는 눈과 딱딱한 얼음이 전부인 헛헛한 터의 이름이 처음부터 스노딘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 땅에 스노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었다. 이 설원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하는 대다수의 괴물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왔던 이방인이었고, 아무도 어디서 이름이 왔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리 악한 유래와 의도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귀와 입술을 타고 지나면 듣기 좋은 동화나 민담이 되어 구전되곤 했다.


박력분 밀가루와 코코아 파우더를 체망에 걸러 그릇에 담았다. 희고 윤이 나는 눈가루 위에 갈색의 자잘한 알갱이들이 섞여 연한 갈색을 띄었다. 미리 옆자리에 두어 천천히 녹아 고소한 향을 풍기는 버터를 그릇에 담고 각진 스크래퍼를 들어 가루와 섞일 수 있도록 곱게 썰어내듯 잘랐다. 버터와 밀가루가 섞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신선한 계란을 풀어 동그란 반죽으로 뭉친다. 남자는 만든 반죽을 냉장고에 두고 문을 닫았다. 그를 등진 쓰레기통 안에는 온갖 모양으로 파이틀 째로 까맣게 타버린 반죽들이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들이 괴물들을 에봇 산의 지하로 몰아넣은 이후로 그들은 하늘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칵테일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해 사랑하는 사람과 별이 보고 싶다고 울먹거리던 괴물도 있었고, 그 옆자리에서 별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골똘히 묻던 개 형태의 수인도 있었다. 아스고어가 인간과의 전쟁 대비와 로열 가드의 정비를 선포하던 날, 왕은 결계를 뚫고 모든 괴물들에게 별과 태양과 하늘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연설을 듣던 괴물들의 전부가 환호했지만, 그 중 대다수가 별과 태양과 하늘이 무엇인지 몰랐을 터였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양을 모르는 샌즈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MTT 브랜드의 문양이 새겨진 오븐이 천천히 예열되길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주방과 연결된 화재 대피문을 열고 바로 나왔다. 양조사들이 기교를 부려 빚은 양주와 맥주병들이 진열장을 꽉 채우고, 바의 안 쪽에는 공들여 닦은 잔들이 종류별로 줄을 선 채였다. 고개를 들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들이 빈 채로 놓여있다. 남자가 항상 자리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의자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스레 길쭉했다. 남자가 약간 허리를 숙이고, 의자에 앉은 키 작은 해골이 살짝 고개를 들면 서로 눈을 마주볼 수 있을 만큼의 높이.


샌즈는 항상 뼈에 관한 짓궂은 농담을 하는 걸 좋아했다.


문을 열고 바람을 안쪽으로 불어넣는 마냥 농을 던지고 나면 그에 호응하듯 휘어지고 와르르 쏟아지는 웃음이 식당 안을 채우는 순간을, 그릴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좋아했다. 손목에 찬 시계에 눈이 갔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파이의 반죽이 알맞게 굳었을 시점이었다.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자 불그스름하게 타는 팔 위로 스노딘의 서늘한 공기가 닿아 작게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 저릿한 감각이 다른 연유에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안경 너머의 시선이 묵묵히 가라앉는다.


냉장고에서 먼젓번 만들어두었던 초콜릿 커스터드 크림과 초콜릿 칩이 든 가나슈 팩, 휴지가 끝난 반죽을 꺼내두었다. 파이틀과 밀대를 찬장에서 들어내고 반죽을 파이틀에 담아 밀대로 얇게 밀어냈다. 반죽의 가장자리가 둥근 레이스 모양으로 엷게 펴진다. 이후 예열이 끝난 오븐 안으로 파이틀을 넣었다. 손을 뻗어 오븐 안쪽을 만지자 적당히 덥혀진 열기가 손을 타고 훅 끼쳐왔다. 오븐의 문을 닫고, 남자는 부엌에 쪼그려 앉은 채 가만히 반죽이 부푸는 모양을 묵묵히 응시했다. 잘 익은 파이의 안에 초콜릿 가나슈와 커스터드 크림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데코레이트하고 조각내 자르면 쫀득하고 달달한 초콜릿 타르트가 된다는 걸 알지만, 남자는 어느 누구도 이 파이를 먹을 수 없음을 안다. 처음으로 파이를 구워달라고 말했던 사람은 샌즈였다. 아무도 없는 소등된 식당, 쇼윈도의 팻말을 CLOSED로 맞추어놓고 문을 잠근 채 몸을 돌렸을 때, 닫힘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거짓말처럼 자신 앞에 똑바로 서 있던 키 작은 해골.


“아직 안 나갔는데, 벌써 문을 닫을 생각이었어? 그릴비.”

“.......”

“난 그냥 부탁을 하러 온거야.”


남자는 당황했지만,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샌즈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임을 그릴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늘 입꼬리가 볼중앙까지 치켜 올라있는 미소짓는 입에서 나온 중저음의 말은, 뜻밖에도 닥쳐올 종말을 고하는 비통의 말들이어서.


“앞으로 저 팻말을 다시 돌리는 일은 없을거야.”

깡마른 뼈손가락들이 쇼윈도의 팻말을 가리켰다.

“도망가. 그릴비. 도고, 래서 도그, 그레이터 도그, 도가미와 도가레사는 이제 여기 없어. 아무도 오지 않을테고, 올 수 없겠지.”

그릴비는 묵묵히 다음 대답을 기다린다.

“이봐.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순간 검은 바탕 안쪽으로 희게 떠있던 눈동자가 사라진 걸 본 듯했다.

“다른 녀석들은 못 와도 난 다시 올 테니깐, 감자튀김이든 햄버거든 양껏 준비해둬.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뼛속까지 저릴만큼 달콤한 것도 괜찮지 않겠어? 초콜릿 타르트같은 거라도. 헤. 아니면...”



그릴비는 잠시 주방의 그을린 천장 무늬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오븐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이는 마치 자신을 죽이듯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샌즈는 예언같은 말을 한 이후 순식간에 떠났고, 스노딘의 바로 입구까지 살아있는 죽음이 닥쳐온다는 소식이 새벽을 뒤흔들었다. 상점 주인과 눈내린 여관 주인 자매가 먼저 짐을 꾸렸고, 도서관에서 책을 찍던 괴물들과 사서, 늘상 거나하게 취해 혀가 풀려있던 토끼 여자도 울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릴비는 떠나지 않았고, 화재 대피로의 문을 걸어잠근 채 문에 기대어 있었다. 더러운 영혼을 가진 학살자조차도 문을 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불이 아니니깐. 그릴비는 오랫동안 그 곳에 죽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고 천천히 불씨가 죽듯 까맣게 타들어갔고, 그 곳에서 식당을 천천히 거니는 작고 어린 발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발소리는 무료한 듯 다시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릴비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작게 저물어가던 몸피가 숨에 반응해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맞닥뜨린 식당은 깨끗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망가진 가구나 식기 하나 없었고, 텅 비어있었다.어떤 인기척이나 말소리도 없는 식당의 내부가 그의 눈엔 완연히 망그러진 듯해, 남자는 한동안 대피로의 문손잡이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말벗 삼아 말을 쏟아내는 이가 없었다.


남자는 손으로 파이를 꺼냈다. 파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까맣게 탄 파이가 열기에 어그러져 파이틀과 엉겨붙듯 텁텁한 연기를 뿜고 있었다. 초콜릿 가나슈와 커스터드 크림은 쓰여지지도 못한 채 다시금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만 연기로 매캐한 주방을 등진 채 그릴비는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희게 서리가 엉긴 유리창 너머로 비척거리는 작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릴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실루엣은 점차 윤곽을 갖추고 그 모양을 선명해졌다. 푸른 빛깔의 두툼한 후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두 팔로 무언가를 끌어안은 채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취한 게 아닌 완전한 제정신임을 상기시킨다. 그가 끌어안고 있는 것이 다름이 아닌 자신의 몸, 정확히는 분명한 악의를 품고 달려든 날선 칼날에 베인 깊은 상처를 품었다는 것을. 그릴비는 저도 모르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쇼윈도의 팻말을 집어들었다. 오래 돌려놓지 않은 탓에 창문에 붙어있던 팻말이, 쩌적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빙그르 돌아 OPEN을 알린다.


“헤, 아니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도 돼.”


오래 전, 샌즈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그릴비는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할 수 있기에 해야만 할 말을 전하기 위해. 샌즈의 몸이 천천히 눈 위로 허물어진다.허벅지와 다리뼈를 훑으며 흘린 피에 젖은 발자국이 새붉었다. 


발목 깊이까지 오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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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osalynn
2015. 11. 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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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esert/Piece2015. 4. 13. 12:30
나무로 만든 소년상.

생목을 베어내고, 틀을 짜고, 흰 속살이 드러나도록 울퉁불퉁한 겉껍데기를 깎아내어 기도하는 소년의 모습을 틔워낸 조각이다. 10년의 세월동안 소년상은 예수상과 제단의 곁에서 신자들을 내려다봤다. 기도의 미명으로 올리는 발악을 눈감은 채 주시하는 소년상의 발 끝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손길이 닿고 먼지가 앉아 더이상 흰 빛이 아닌 맨발이다. 남자의 혀 끝이 마른 입술을 넓게 쓸었다.

소년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오래 전의 일이다. 십자 펙토랄레를 쥐며 검은 베일 너머에서 죄악을 고해하는 아이를 볼 때면 컴컴한 밤 속에서 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어린 새 한 마리를 보는 듯해 마음이 갔다. 스티브 맥마나만. 열 여섯 살이예요. 도둑질을 했어요. 배가 고파서 빵을 하나 훔쳤는데, 아주머니는 모르시는 것 같아요. 너무 가슴이 아파요. 허겁지겁 먹어버렸는데 아직도 배가 고파요. 아버지가 술을 끊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언제 돌아오실까요? 소년은 손을 모은 채 종알거리고, 보이지 않는 휘장 너머 신부복을 입은 남자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빤다. 거칠게 일어난 입술을 짓뜯고 나면 입술 군데군데 벌건 흉이 남았다. 잊을 수 있는 욕정이라 기대했었다. 핏방울이 맺혀 쓰라린 상처가 아물고 나면 소년은 어김없이 고해실로 찾아들었다. 그럴 때면 다시금 숨이 거칠어져온다. 소년의 한탄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소년의 목소리는 어떤 깊이를 가졌는지, 어느 때 말 끝이 올라가는지, 간혹 터뜨리는 울음이 얼마나 남자를 자극케 하는지만이 바로 귓속을 울릴 뿐이었다.

소년은 오늘도 제 슬픔을 토해내다 자리를 떴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남자는 소년이 앉았던 의자 위로 몸을 옮겼다. 등받이가 없는 나무 의자에 스며든 온기가 미지근하게 남아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가공된 목재 냄새가 났다. 숲에서 외따로 떨어져나온 나무의 시체를 뺨에 문대며 스스로 숲에 있다 망상하는 한 마리 까마귀처럼, 그는 어렴풋 식어가는 소년의 체온에 제 뺨을 문지른다. 그것이 설령 소년의 얇은 허벅지나 조그마한 가슴팍이 아닌, 엉덩이를 받치는 면이 맨들해지도록 낡은 한 개의 의자일 뿐이라 하더라도.

남자는 소년을 마음으로 그릴 때면 어둠 속에 묻힌 얇은 윤곽과, 아직 짐을 짊어지기엔 너무도 어린 어깨를 먼저 상정하곤 했다. 장막을 걷어내기를. 선명한 낯빛으로 자신을 놀라 돌아보는 그 순간을 그린다. 네가 토해낸 긴 울음 아래 섰다. 늘 울음 뿐이고 한숨으로 찬 너를 안는 상상을 한다. 피부 아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대고 여린 입술을 삼키는 꿈을 아니 꾼 적 없다. 그런 갈망에 휩싸일 때면 목이 말라왔다. 신부 이삭이기 이전, 그저 달아오른 몸 위에 신부복을 걸친 게 전부인 욕망하는 인간. 자신보다 어린 존재에게 욕정하는 인간. 제 발정을 숨기려 어두운 베일 너머에서 평정한다 우기는 동물.

"신부님."

소년이 그를 부른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는 고개를 들어 고해실의 문고리에 손을 얹고 붙들었다.

"난 헤르만이다."
"예?"

연극적인 무표정. 비틀린 욕망. 남자는 신부복 목께 아래 숨은 흰 로만 칼라를 쥐어뜯는다. 거추장스러운 펙토랄레를 바닥 위로 팽개치고, 몸을 숙여 신발의 해진 부분을 뚫고 드러난 엄지를 숭고하게 두 손으로 쥔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가볍게 입술 안 쪽으로 머금고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소년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붉게 서린다. 입술을 떼고 나른하게 웃으며, 헤르만 디히터는 눈을 들어 소년과 시선을 길게 마주한다. 그림자가 짙었다.

"신부가 아니고."

아직도 그는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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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osalynn
2015. 3. 2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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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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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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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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