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당의 쇼윈도에는 CLOSED라 적힌 정갈한 손글씨의 팻말이 걸려 있었다. 창백한 낯의 남자가 문을 열고 가게의 한복판으로 들어섰을 때 마지막 잔을 닦던 식당 주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두 다리를 전부 덮는 길이의 새까만 가운이 어둠 속에서 너울거렸다. 마른 헝겊으로 닦아낸 유리컵에선 잔잔한 광택이 돌았고 식당 주인의 손 끝에서 주홍과 옅은 노란 빛이 타올라 잔 위를 비췄다.
소란은 항상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만 지속되는 법이었고, 모두가 떠난 식당은 적막했다. 불타는 몸을 한 식당 주인은 홀로 혼잣말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자신만이 떠들곤 하는 그 순간을 소란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소란은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지만,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고 전해지지 않는 말들은 연기처럼 허공에 머물렀다 가는게 고작이다. 말들 속에 남은 뼈를 의미란 이름으로, 전하고 싶었던 뜻들을 남은 재와 매캐한 향내를 맡듯 조용히 곱씹는 건 그릴비뿐이다. 마감시가 지난 뒤 찾아온 손님은 불청객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릴비의 혼잣말이 지나고 난 뒤의 고요를 조용히 엿듣듯 두 손을 모으고 뜻모를 웃음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대접하고 더 머무르도록 배려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릴비는 잔을 내려놓고, 오래 쥐고 있어 체온처럼 뜨끈해진 마른 헝겊도 바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긍정도 부정도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표현이었다. 새까맣게 젖은 눈동자는 얼굴을 거의 잡아먹을 만치 큼지막했고 검은 눈물이 흘러내린 듯한 흔적이 한쪽 뺨 위로 새겨져 있었으며 반대 쪽에는 그 울음을 뒤집은 것처럼 창백한 낯에 분명한 균열같은 것이 이마 위로 나 있었고, 앞으로 모은 두 손등의 정중앙은 원벽한 원 모양으로 뚫린 채였다. 손가락의 관절뼈와 마른 모양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샌즈나 그의 동생과 같은 해골일지도 몰랐다. 그릴비는 제 육신의 열기가 긴장에 이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 한 개 반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어 그릴비는 남자의 전신을 잘 바라볼 수 있었다. 남자는 까맣게 웃으며 입을 벌려 무어라 속삭였다. 평범한 괴물들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의 구멍난 손이 함께 움직이고 눈 앞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의 나열들이 지나갔다. 폭탄, 편지 모양, 제각기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모양들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낯선 소리가 되어 귀와 육신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청탁.
그릴비는 본능적으로 잔을 움켜쥐었다.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자여서, 내가 손을 뻗고 말하고 닿으려 해도 그럴 수 있는 몸이 이 시간선에는 존재하지 않아. 관찰자가 자신의 유희를 위해 내 몸을 재조립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아주 잠깐이나마. 다른 시간선에 간섭할 수 있는 때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었지만 그릴비는 가만히 듣는 것을 택했다. 그의 말대로 눈 앞의 남자가 조금씩 허물어가는 모습이 느껴졌다. 남자의 몸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고, 혹은 고장난 TV 화면처럼 일부가 노이즈가 끼고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릴비는 바에서 나와 남자를 들여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릴비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야. 내게는 계속될 일이지. 몇 번이고. 입을 벌려 웃자 새까만 입 안이 들여다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 앞에서, 귓속에서 웅웅대 들렸다. 얼굴의 근 절반을 덮다시피한 눈동자에 집중할수록 곧 온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고 형체를 잃는 착각이 그릴비의 등 뒤를 타고 기는 듯하다.
1
우리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연구했지. 세상의 인과를 바꾸는 힘. 그러나 나는 너무도 빠르게 모든 것을 알아버렸어. 결계로 나누어진 인간과 괴물의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돼. 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관찰자가 있고, 우리를 간섭할 수 있는 관찰자의 세상이, 이 세상 바깥에 있단 말이지. 다시 생각해봐. 관찰자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있지. 그가 우리보다 더 고차원의 존재라면? 관찰자들의 뜻이, 인간에게 ‘의지’를 갖게 한 근본이라면? 최초로 이 세상을 창조한 신 역시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 관찰자라면?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에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 대체 무엇일까? 실험당하고 괴로워하는 실험체들의 반응이 아닐까? 의지만으로 몇 번이고 뒤집어지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실험체나 마찬가지인 세상이라네. 결과를 얻기 위해, 혹은 이 실험의 끝을 보기 위해서. 그래서 청탁할 것이 있단 말이지. 매우, 매우, 흥미로운.
기억해. 실험의 주체인 관찰자Observer는 간섭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실험은 그때부터 실험이 아니야.
남자의 손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검고 흰 편린들이 쏟아져 그릴비의 안으로 흘러들어와, 하얀 심장Heart 모양으로 굳는다.
183.
샌즈. 당신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소리내 부르는 게 조금 어색합니다. 당신 역시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리란 것 역시 믿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저는 기이한 경험을 했기에, 그저 당신께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농담을 하면 저는 기울여 당신의 말을 듣는 역할이었건만, 이제는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입장이 되었군요. 웃고 있습니까?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 했습니다. 거품이 피어오르는 듯 둥근 미소도 본 것 같았습니다.
...샌즈. 제가 공들여 닦아온 삶이 어떤 이에게는 테이프를 되감듯 쉽고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에게 제 생각을 전부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사실과는 다른 제 독자적인 생각들 말입니다. 당신은 이미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을테니깐요. 세상을 소거할 수 있는 힘, 구원하고, 불러올 수 있는 힘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사태의 배후를 만난 것도 아니거니와, 세상이 여러 차례 ‘리셋’-그의 표현을 빌리자면-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왕실 과학자로 칭했던 그 남자는 제게 알 수 없는 지식들을 남겨주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며칠동안 가게를 닫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스노딘의 책에서 찾고자 했습니다만 저는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다며 사서에게 정중히 거절당했습니다. 몇십번 전의 낡은 시간선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겠죠. 차마 당신에게는 청할 수 없을 것만 같아 파피루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두툼한 퍼즐 풀이 도서와 동화책을 들고 제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를 만난 이후 제가 특별한 힘을 얻지 않는 이상 이 불완전한 인과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기에,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리셋의 횟수를 인지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前) 왕실 과학자를 만난 이후로 리셋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얼만큼 세상이 되돌려지고 없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깐요.
샌즈. 꿈을 자각할 수 있는 통상적인 방법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꿈 일기를 쓰고, 꿈에서 비롯되는 세계의 어긋남에 대해 인지하고, 꿈과 현실이 상충하는 때 바로 깨닫는 것 뿐입니다. 일기를 써도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저는 수십 번이고 되뇌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왕실 과학자가 전해준 것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마도 꿈은 아닐테지만, 이 현실이 몇 번이고 되돌려졌단 사실은 꿈을 자각하는 것과 무척 비슷했습니다. 제가 자각몽을 깨달을 수 있었던 토템은 주크박스였습니다. 왕실 과학자가 제 눈 앞에서 흐려져 사라진 이후 저는 그의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당신에게 줄 케찹을 엎지르기도 했고, 그대에게 말도 없이 식당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화재 대피로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으면 미처 끄지 않은 주크박스에서 반도네온의 탄주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워지는 감각은 죄악보다도 선명했습니다.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생각했지만 갑작스레 기름 냄새가 나는 바 안으로 되돌려져있음을 느꼈을 때, 주크박스 안에 음악을 하나씩 넣기로. 다른 곳에 있다가도 문득 이 곳에 서 있을 수많은 그릴비들과 암묵적으로 약속했고, 혼잣말을 하는 버릇을 버렸습니다. 주크박스는 반도네온의 선율이 주를 이루는 재즈는 피아노 소나타가 되었고,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그로울링이 인상적인 이모코어 음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서 흘러들어왔던 심연에서는 관성이 느껴집니다. 나침반이 자력에 반응하듯 제 안에서 다른 극을 향해 기울어지는게 느껴지면 주크박스의 음악을 하나씩 추가합니다. 음반들은 풍족해지고, 손님들은 하나같이 오늘의 음악이 좋다고 말합니다. 재즈, 피아노 소곡, 이모코어 락이든 똑같은 답을 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샌즈. 이제 전 100번이 넘는 리셋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더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수많은 반복 속에서 당신의 행복이 조각나고,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수백 번은 더 꼬였음을 얼마나 더 알아차리고, 잊고, 또 뒤늦게 깨달았을까요.
눈 앞으로 눈발이 부서져, 불꽃과 만나 순식간에 녹아내립니다.
스노우딘은 늘 똑같습니다. 춥고 고요하고, 밟기 좋은 눈이 쌓여 있습니다. 당신을 눈 앞에 두고도 이런 말을 하다니 어색합니다. 당신 앞에서는 제가 어떤 말을 이야기하던지 혼잣말같아, 혼잣말을 잊은 이후론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죠. 속을 털어놓은 이야기에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크게 소리질렀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허무할 따름이니깐요.
먼 데서 당신 말을 들어주는 높은 산보단 가까운 데서 당신을 둘러싸고 공명하는 동굴이고자 했습니다. 모두가 빠져나간 식당에서, 제 불빛이 오롯이 당신만을 비추고 있을 때. 당신은 처음으로 제 앞에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잊지 않는다고, 잊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주어가 가리키는 것이 없었기에, 저는 그저 당신을 향해 온기를 베푸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으니깐요. 이제는 당신에게,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처연했다고.
185.
샌즈.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주크박스의 곡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영혼이 어딘가를 향해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질때면 주크박스의 음악을 한 곡 더 추가합니다. 음악이라 명하기엔 묘한, 빗소리만을 1시간동안 녹음해놓은 LP판입니다. 당신은 치즈감자튀김을 우물거리다, 레코드판의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동전 한 닢을 넣은 후 가장 마지막에 넣어놓은 음악을 듣습니다. 항상 그랬겠지요. 당신이 제게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손님들은 좋은 음악이라며 장난스레 웃었고, 저는 무표정으로 화답하기로 합니다. 제 말을 마음대로 왜곡하기도 하는 손님의 통역에도 침묵을 지키기로 합니다. 잔을 닦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갑니다. 제 손이 잔을 닦으면, 손은 계속해서 잔을 그을립니다. 그을린 잔을 닦는 동안, 잔을 닦는 손은 계속해서 잔의 다른 면을 까맣게 그을리죠. 세상은 이런 단편적인 반복입니다. 제 세상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 중 하나를 포기하고, 반복적인 것들에 몰두할 때마다 당신은 뭔가를 알아채고 있다는 듯 저를 자세히 바라봅니다. 그러면 저 역시, 안경 너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이 이 곳에 머무는 시간이 전보다 길어지고,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알쏭달쏭한 말들을 팁처럼 건네고 넌지시 떠납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면 당신은 호선을 그리는 눈매로 눈을 감은 채 웃어야 하건만,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제 세상을 관찰하는 그가 세상을 지워주길 바라는 것 뿐입니다. 폭격과 총성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전쟁고아처럼. 소리 없이 울부짖고 멀어버린 귀를 부여잡으면서.
186.
샌즈. 당신 역시, 이 뒤틀린 인과를 제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뿐인 동생에게 이 세상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다인에게 그것을 죽이라고 애원합니다. 당신은 진실의 연구소 앞에서 들려오는 융합체들의 울부짖음에 몸을 떱니다. 당신은 아스고어를 가로막으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은 폐허의 문을 두드리며 농담 대신 울음을 토로합니다. 모두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위로하고,알겠다고 말한 후, 다음 날 잊어버립니다. 당신은 메아리꽃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메아리꽃이 말한 말을 다른 메아리꽃이 말하고, 작은 말이 수많은 말이 되어 자장처럼 퍼져나갑니다. 둥근 자장은 소란이 되고, 자정을 거친 거대한 백색소음이 되어 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당신은 워터폴의 빗속에서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울기 시작합니다. 빗소리는 메아리꽃의 숫자만큼 복제된 당신의 괴로움 같고, 또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내립니다.
당신은 이런 말을 제 앞에서 한 적 없지만, 세상에는 침묵으로 가릴 수 없는 게 있음을 당신 역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선의 뒤틀린 인과에 관한 어떤 말도 전한 적 없으나, 그대가 저를 향해 던지는 시선 하나하나가 반복되는 동정과 공감임을 압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것조차 놓아버린 후 심판의 길을 택한 그대가 같은 처지의 방랑자를 향해 건네는 몸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에 답해주십시오.
187.
“당신을 사랑합니다. 샌즈.”
후드가 타들어갔습니다. 재투성이가 되면서도 당신은 즐겁다는 듯 웃습니다. 벗겨진 분홍 슬리퍼가 뒤집어진 채 식당의 바닥을 구르고, 당신은 저를 끌어안으며 가쁜 숨을 내쉽니다.
188.
주크박스에 꽂힌 레코드의 수를 세다 조용히 판을 닫았습니다. 샌즈. 저는 LP의 개수를 세는 것을 체념했습니다. 당신처럼 또 하나 놓아버린 셈입니다. 얼마만큼의 되돌림을 겪어야 모든 것을 놓을 수 있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습니다. 왕실 근위대병과 다른 단골들이 각자의 초소와 집으로 돌아간 이후 당신과 제가 단 둘이 바에 남아있습니다. 정확힌, 당신이 저를 일방적으로 지켜보는 풍경에 가까울 겁니다. 당신은 두 손을 깍지낀 채 그 위로 얼굴을 올려놓고선 절 지긋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겠지만, ...저도 당신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이 피로하진 않습니까?”
“...무슨 일이야. 그릴비? 네가 먼저 말을 다 걸고.”
“... ...”
당신은 호박색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든 채 넌지시 웃습니다. 당신이 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 느껴질 때면 차라리 그 과학자의 청탁을 들어선 안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경다리를 손으로 잡아 추켜올리고 고개를 떨군 채 태연히 잔을 닦으려 하는 순간, 푸른 섬광같은 것이 지난 듯한 걸 느꼈습니다. 바에 반쯤 엎드린 채 여유롭게 잔을 흔들고 있던 당신이 바로 제 옆에 서 있었습니다. 어쩐지 애틋한 낯을 하고서.
“... ...”
저는 늘 그랬듯 침묵합니다. 괴물들의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논리가 있습니다. 과학자를 통해 가장 단편적인 것만을 항상 당신의 주위를 도는 위성처럼 당신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샌즈.”
당신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순간, 당신은 고갤 들어 웃어보입니다. 당신은 늘상 짓는 웃음으로 조금씩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제일 어려운 건 말야, 그릴비...”
“...”
“내가 너에게 자꾸 의지하게 된다는 거야.”
“...”
“난 파피루스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해. 내 동생도 내 무책임의 일부야. 헌데 네가 요리한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고, 네가 들려주는 음악을 함께 듣고 있어. 난 많은 걸 포기했으면서도, 너만은 무슨 마지막 등불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의지하게 된다는 거야.”
“...샌즈.”
“헤, 무슨 일이야?”
“제게 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데?”
어떤 시간선에서 저는 당신을 안고 타올랐을 것이고, 또 어떤 시간선에서는 당신의 뼈와 이빨을 널름대듯 핥으며 뜨겁게 입맞추었을지도 모릅니다. 팔을 뻗어 하얗고 마른 손을 쥐자 기다렸다는 듯 당신의 손이 제 손바닥을 맞대고 손가락 사이로 엉겨붙듯 깍지를 낍니다. 손마디 하나 반만큼 작은 손을 뜨겁지 않은 체온으로 감아쥐고서 저는 허리를 숙이고 당신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봅니다. 당신의 눈구멍 안의 작고 흰 빛이 저를 응시하다, 곧 까맣게 웃어보입니다. 많은 반복이 진행되는 중에도 세상은 움직이고, 당신을 위협하는 무언가도 천천히 기어올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의 웃는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눈부시네. 가볍게 고개를 으쓱 치켜올린 당신이 제게 물어옵니다.
“있잖아, 그릴비. 한 가지만 먼저 물을게.”
“...”
“...오늘은 손만 잡는거야?”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늘은 그저 오늘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의 불로 만들어진 육신 안에서 굳건히 잠들어있을 영혼이 당신을 보는 순간 자꾸만 함께 타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식당의 잔과 술병의 수로도 세아릴 수 없을 만큼 되돌아온 원점의 회귀에도 당신만이 제 구원의 점이 되어 아른하게 빛나고 있을 따름입니다. 구슬이 구르듯 왁자하게 쏟아지는 소란을 몰고 헤어질 때는 썰물처럼 사라지는 당신을.
이 모든 반복과 반복, 부름과 부름, 구원 아닌 구원, 물흐르듯 중앙을 향해 약진하는 레코드판의 바늘을 성급하게 긁어 가장자리로 옮겨대는 ‘관찰자’의 억센 손길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알고 있어.”
당신은 제 진심을 마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합니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웃어보이지만 그 얼굴이 유난히도 서글펐습니다. 낮게 깔리는 저음의 육성이 건조합니다.
“당신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잔인하네.”
제 몸이 재가 되어 사라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영혼이 알려주는 것은 레코드판의 갯수, 그리고 그 판의 갯수만큼 쓰러진 당신 뿐입니다. 당신이 제게, 제가 당신께 다가가는 이유는 단순한 동병상련일 수도 있으며, 혹은 동족에게 갖는 애착일지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래 전의 제가 당신께 제 진심을 말씀드렸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렇듯, 당신은 다가온 미래의 파멸을 깨달은 예언자처럼 덧없이 행동합니다. 허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노력할게.”
이 세상의 뒤틀린 순환을 막을 수 없는 저의 입장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냥 잘 했다고만 말해줘.”
“잘 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189.
그저 제 세상을 떠난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웃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190.
샌즈.
레코드판이 의미없이 쌓여갑니다. 당신이 끝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원망하거나 소리내어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한 터를 잡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도움도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겁습니다. 팻말을 CLOSED로 돌려놓은 후 식당의 문을 잠근 후 당신의 자취를 쫓기로 결심했습니다.
소원의 방에서 본뜻조차 알지 못할 만큼 뭉개진 음성을 귀기울여 듣다,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메아리꽃을 향해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속삭였습니다. 우산을 높이 든 채 워터폴의 비와 수풀을 건넜고, 전광판이 있는 다리를 건너 핫랜드에 도착했습니다. 비어있는 연구소와 망가진 메타톤의 잔해-금속 몸체에 덩굴이 휘감긴 자국이 분명히 남아 있었습니다-를 목도하고, 작동하지 않는 퍼즐을 건넜고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새로운 집을 지나 마지막 통로에 들어섰을 때, 알현실을 향해 뻗은 통로에서 황금빛 광휘를 등지고 선 당신은 되려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였습니다. 세 번의 종소리가 먼지를 흩뿌리며 우는 곡처럼 울린 그 순간, 여섯 장의 꽃잎을 위협적으로 펼치며 덩굴을 뿌리처럼 펼쳐드는 ‘그것’을 향해 당신이 왼눈에서 푸른 안광을 뿜어냅니다. 꽃의 소름끼치는 비웃음을 면전에서 반박하듯 당신이 웃었고, 통로의 바닥에서 분명한 적의를 품은 뼈들이 가시와 같이 솟아올라 ‘그것’을 향해 달려듭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저지하고자 했고, 당신은 마치 퍼즐을 내듯 뼈다귀를 깔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괴수의 두개골 모양을 한 병기에서 직선형의 광선을 쏘아냅니다. 당신을 향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쓰러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리셋 속에서도 당신이 죽는 모습을 충분히 보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입을 막은 덩굴과 잎사귀 때문에 숨이 막혔습니다. 당신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덩굴에 붙잡힌 두 손목이 순식간에 부서집니다. 순간 선혈이 튀었습니다.
지루해.
당신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동공이 사라진 까만 눈으로 피를 흘리며, 고장난 인형처럼 누워 있습니다. 몸피를 키우며 당신을 위협하던 꽃은 당신의 절반 정도의 몸으로 돌아와서 당신을 굽어보며 히죽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새로운 패턴을 연구해볼 생각은 없는거야? 이젠 익숙할 지경이라구.
“시도를 왜 해?”
뭐, 내가 잘 하면 네 친구들 곁으로 보내줄지도 모르잖아. 네 친구 플라위가 널 위해서!
“다시는 그들을 못 봐.”
어째서 이런 실실 웃기만 할 줄 아는 병신같은 녀석이 이런 귀찮은 힘을 갖고 있는 거야? 내가 널 백만 조각으로 부숴버리는 꼴을 네 동생과 널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저 멍청한 불꽃 대가리 앞에서 보여주려고? 이 세상의 괴물이 너 혼자 남아서,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는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줄까?
“그냥 포기해. 나처럼.”
발랄한 체하며 이죽이는 꽃의 얼굴은 분명한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악마가 웃었습니다. 그리고.
190.
샌즈. 제가 수많은 반복을 느끼는 동안 레코드판이 쌓이는 것만을 기억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같이, 시간선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일정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그리고 당신이 피를 흘리며, 제 앞에서 쓰러져 먼지가 되는 횟수.
“Heh.”
“…샌즈. 샌즈.”
“별것 아, 냐… 헉. 허억. 오늘은….”
“…제발.”
“햄버거에, 케찹 잔뜩 얹어 먹을까. 응…?”
핏물이 배어나오는 상처를 부여잡은 손이 천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집니다. 푸른 점퍼가, 잘 웃는 얼굴이, 슬리퍼와 정강이뼈가 먼지로 변해 사라집니다. 당신의 몸을 흔들며 의식을 차리길 기도하려 했으나 흔들고 손을 잡을 몸이 없습니다. 장갑을 낀 손에 천천히 뼛가루가 묻어 하얗게 변하고, 곧 스노딘의 눈과 섞여 어느 것이 당신의 잔해인지 구별조차 어렵습니다. 피로 젖은 눈발을 손으로 쥡니다. 제 모습을 기이하게 여길 타인들이 이 곳엔 더 이상 없습니다. 샌즈. 저는 너무도 외롭습니다. 샌즈. 당신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소리내 부르는 게 지금도 어색합니다. 당신이 지금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리란 것 역시 믿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저는 기이한 경험을 했기에, 그저 당신께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농담을 하면 저는 기울여 당신의 말을 듣는 역할이었건만, 이제는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입장이 되었군요. 웃고 있습니까?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 했습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헐렁한 후드와 반바지 차림, 거품이 피어오르는 듯 둥근 미소까지.
191.
“넌 나처럼 되면 안 돼.”
“.......”
“네가 이 순환을 깨닫는 방식을 알아.”
“.......”
“그리고 넌 영원히 나를 기다리겠지만, 난 네 앞에서 죽는 꼴만 보이겠지. 응? 내가 몇 번 죽었더라? 기억나?”
“.......”
“그러니깐 한 마디만 하자면...”
“샌즈.”
“나를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마. 그릴비. 난 책임질 위인같은건 애초부터 아니었으니깐.”
19■.
그릴비의 발치에서 레코드판이 불탄다. 빗소리를 담은 LP판, 반도네온이 있는 재즈, 이모코어 락, 피아노곡이 쪼그려앉은 그의 손길을 만난 순간 불이 붙어 잿더미로 화한다. 타는 냄새가 독하게, 단 둘만이 남은 실내를 채우고 있다. 190장 가까이 되는 레코드판이 전부 불타는 광경은 마치 실내 안에 작은 모닥불을 들여놓은 듯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레코드판에 붙은 불꽃이 널름거리며 주크박스와 가게의 나무바닥과 벽을 핥듯이 새까맣게 그을린다. 샌즈는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그 광경을 그릴비의 등 뒤에서 지켜보고 선다.
이대로 불지옥이 되어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지? 무너지는 네 세상 안에서, 너를 껴안고 입맞추면 좋겠는데 너무 귀찮은 일이잖아. 들리지 않을 만큼 그는 낮게 속삭인다. 한쪽 눈에서 일렁이는 푸른 안광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샌즈는 불타는 주크박스를 등진 채 그 자리를 벗어난다. 후드의 팔소매가 젖어 있었다.
1.
샌즈가 그릴비스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늘상처럼 혼자가 아니라 줄무늬 셔츠를 입은 인간 한 명을 데리고 온 채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는 인간에게 샌즈는 헐렁한 농담을 던지다가 감자튀김 두 개를 주문하고, 케찹을 품에서 꺼내 한번에 마신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멈춘다. 파피루스가 봤다면 또다시 시공간 장난을 치는 것이라며 투덜거릴만한 종류의, 그런 것. 그릴비는 잔을 붙든 채 그대로 굳어 있고, 샌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메아리꽃과 노란 꽃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섞어 말한다. 자신이 수 십번 죽였고 자신을 수 십번 죽였던 노란 꽃 이야기를.
“...뭐, 누가 메아리꽃으로 걔한테 장난치나봐.”
노란 꽃이 자신의 허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파피루스의 목을 꺾고, 척추를 졸라 부숴버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자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릴비는 그가 포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떠올릴 수 없다.
“꼬마야. 내가 지금 빈털터리라서 그런데 말야, 돈 좀 대신 내줄래? 10000G면 돼.”
이상할 만큼 많은 금액은 모든 시간선을 통틀어 샌즈가 그릴비에게 빚진 값이지만, 자각을 포기하고 깊은 꿈의 내핵 속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그릴비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잔을 닦는다. 혼잣말을 포기했던 언젠가처럼 이젠 대화를 포기한 것마냥. 바로 앞에서 바에 앉아 술에 거나하게 취한 괴물이 감자튀김은 식었을 거라며 목소리를 높여 저 대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1.
(주크박스는 고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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