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y desert/Short

[그릴샌즈] 초콜릿 타르트와 안온한 말

Rosalynn 2016. 2. 5. 22:15








발목 깊이까지 잠길 만큼 눈이 쌓였다. 몇 보폭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엇비슷한 키로 자라있는 침엽수의 바늘같이 돋아난 이파리에도 딱 그만큼의 너비만큼 눈이 쌓였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곧 부스러질 하얀 나뭇잎 위로 진녹색 그림자가 진 것 같았다.  새 집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폐허의 괴수들 중 털 많은 금수들과 살집이 두터운 괴물들이 머물러 터를 지은 곳이 곧 마을이 되었고 스노딘이라는 이름을 갖췄다. 어쩌면 있는 건 하얗게 내리는 눈과 딱딱한 얼음이 전부인 헛헛한 터의 이름이 처음부터 스노딘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 땅에 스노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었다. 이 설원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하는 대다수의 괴물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왔던 이방인이었고, 아무도 어디서 이름이 왔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리 악한 유래와 의도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귀와 입술을 타고 지나면 듣기 좋은 동화나 민담이 되어 구전되곤 했다.


박력분 밀가루와 코코아 파우더를 체망에 걸러 그릇에 담았다. 희고 윤이 나는 눈가루 위에 갈색의 자잘한 알갱이들이 섞여 연한 갈색을 띄었다. 미리 옆자리에 두어 천천히 녹아 고소한 향을 풍기는 버터를 그릇에 담고 각진 스크래퍼를 들어 가루와 섞일 수 있도록 곱게 썰어내듯 잘랐다. 버터와 밀가루가 섞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신선한 계란을 풀어 동그란 반죽으로 뭉친다. 남자는 만든 반죽을 냉장고에 두고 문을 닫았다. 그를 등진 쓰레기통 안에는 온갖 모양으로 파이틀 째로 까맣게 타버린 반죽들이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들이 괴물들을 에봇 산의 지하로 몰아넣은 이후로 그들은 하늘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칵테일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해 사랑하는 사람과 별이 보고 싶다고 울먹거리던 괴물도 있었고, 그 옆자리에서 별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골똘히 묻던 개 형태의 수인도 있었다. 아스고어가 인간과의 전쟁 대비와 로열 가드의 정비를 선포하던 날, 왕은 결계를 뚫고 모든 괴물들에게 별과 태양과 하늘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연설을 듣던 괴물들의 전부가 환호했지만, 그 중 대다수가 별과 태양과 하늘이 무엇인지 몰랐을 터였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양을 모르는 샌즈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MTT 브랜드의 문양이 새겨진 오븐이 천천히 예열되길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주방과 연결된 화재 대피문을 열고 바로 나왔다. 양조사들이 기교를 부려 빚은 양주와 맥주병들이 진열장을 꽉 채우고, 바의 안 쪽에는 공들여 닦은 잔들이 종류별로 줄을 선 채였다. 고개를 들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들이 빈 채로 놓여있다. 남자가 항상 자리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의자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스레 길쭉했다. 남자가 약간 허리를 숙이고, 의자에 앉은 키 작은 해골이 살짝 고개를 들면 서로 눈을 마주볼 수 있을 만큼의 높이.


샌즈는 항상 뼈에 관한 짓궂은 농담을 하는 걸 좋아했다.


문을 열고 바람을 안쪽으로 불어넣는 마냥 농을 던지고 나면 그에 호응하듯 휘어지고 와르르 쏟아지는 웃음이 식당 안을 채우는 순간을, 그릴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좋아했다. 손목에 찬 시계에 눈이 갔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파이의 반죽이 알맞게 굳었을 시점이었다.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자 불그스름하게 타는 팔 위로 스노딘의 서늘한 공기가 닿아 작게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 저릿한 감각이 다른 연유에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안경 너머의 시선이 묵묵히 가라앉는다.


냉장고에서 먼젓번 만들어두었던 초콜릿 커스터드 크림과 초콜릿 칩이 든 가나슈 팩, 휴지가 끝난 반죽을 꺼내두었다. 파이틀과 밀대를 찬장에서 들어내고 반죽을 파이틀에 담아 밀대로 얇게 밀어냈다. 반죽의 가장자리가 둥근 레이스 모양으로 엷게 펴진다. 이후 예열이 끝난 오븐 안으로 파이틀을 넣었다. 손을 뻗어 오븐 안쪽을 만지자 적당히 덥혀진 열기가 손을 타고 훅 끼쳐왔다. 오븐의 문을 닫고, 남자는 부엌에 쪼그려 앉은 채 가만히 반죽이 부푸는 모양을 묵묵히 응시했다. 잘 익은 파이의 안에 초콜릿 가나슈와 커스터드 크림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데코레이트하고 조각내 자르면 쫀득하고 달달한 초콜릿 타르트가 된다는 걸 알지만, 남자는 어느 누구도 이 파이를 먹을 수 없음을 안다. 처음으로 파이를 구워달라고 말했던 사람은 샌즈였다. 아무도 없는 소등된 식당, 쇼윈도의 팻말을 CLOSED로 맞추어놓고 문을 잠근 채 몸을 돌렸을 때, 닫힘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거짓말처럼 자신 앞에 똑바로 서 있던 키 작은 해골.


“아직 안 나갔는데, 벌써 문을 닫을 생각이었어? 그릴비.”

“.......”

“난 그냥 부탁을 하러 온거야.”


남자는 당황했지만,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샌즈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임을 그릴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늘 입꼬리가 볼중앙까지 치켜 올라있는 미소짓는 입에서 나온 중저음의 말은, 뜻밖에도 닥쳐올 종말을 고하는 비통의 말들이어서.


“앞으로 저 팻말을 다시 돌리는 일은 없을거야.”

깡마른 뼈손가락들이 쇼윈도의 팻말을 가리켰다.

“도망가. 그릴비. 도고, 래서 도그, 그레이터 도그, 도가미와 도가레사는 이제 여기 없어. 아무도 오지 않을테고, 올 수 없겠지.”

그릴비는 묵묵히 다음 대답을 기다린다.

“이봐.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순간 검은 바탕 안쪽으로 희게 떠있던 눈동자가 사라진 걸 본 듯했다.

“다른 녀석들은 못 와도 난 다시 올 테니깐, 감자튀김이든 햄버거든 양껏 준비해둬.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뼛속까지 저릴만큼 달콤한 것도 괜찮지 않겠어? 초콜릿 타르트같은 거라도. 헤. 아니면...”



그릴비는 잠시 주방의 그을린 천장 무늬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오븐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이는 마치 자신을 죽이듯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샌즈는 예언같은 말을 한 이후 순식간에 떠났고, 스노딘의 바로 입구까지 살아있는 죽음이 닥쳐온다는 소식이 새벽을 뒤흔들었다. 상점 주인과 눈내린 여관 주인 자매가 먼저 짐을 꾸렸고, 도서관에서 책을 찍던 괴물들과 사서, 늘상 거나하게 취해 혀가 풀려있던 토끼 여자도 울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릴비는 떠나지 않았고, 화재 대피로의 문을 걸어잠근 채 문에 기대어 있었다. 더러운 영혼을 가진 학살자조차도 문을 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불이 아니니깐. 그릴비는 오랫동안 그 곳에 죽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고 천천히 불씨가 죽듯 까맣게 타들어갔고, 그 곳에서 식당을 천천히 거니는 작고 어린 발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발소리는 무료한 듯 다시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릴비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작게 저물어가던 몸피가 숨에 반응해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맞닥뜨린 식당은 깨끗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망가진 가구나 식기 하나 없었고, 텅 비어있었다.어떤 인기척이나 말소리도 없는 식당의 내부가 그의 눈엔 완연히 망그러진 듯해, 남자는 한동안 대피로의 문손잡이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말벗 삼아 말을 쏟아내는 이가 없었다.


남자는 손으로 파이를 꺼냈다. 파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까맣게 탄 파이가 열기에 어그러져 파이틀과 엉겨붙듯 텁텁한 연기를 뿜고 있었다. 초콜릿 가나슈와 커스터드 크림은 쓰여지지도 못한 채 다시금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만 연기로 매캐한 주방을 등진 채 그릴비는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희게 서리가 엉긴 유리창 너머로 비척거리는 작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릴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실루엣은 점차 윤곽을 갖추고 그 모양을 선명해졌다. 푸른 빛깔의 두툼한 후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두 팔로 무언가를 끌어안은 채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취한 게 아닌 완전한 제정신임을 상기시킨다. 그가 끌어안고 있는 것이 다름이 아닌 자신의 몸, 정확히는 분명한 악의를 품고 달려든 날선 칼날에 베인 깊은 상처를 품었다는 것을. 그릴비는 저도 모르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쇼윈도의 팻말을 집어들었다. 오래 돌려놓지 않은 탓에 창문에 붙어있던 팻말이, 쩌적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빙그르 돌아 OPEN을 알린다.


“헤, 아니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도 돼.”


오래 전, 샌즈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그릴비는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할 수 있기에 해야만 할 말을 전하기 위해. 샌즈의 몸이 천천히 눈 위로 허물어진다.허벅지와 다리뼈를 훑으며 흘린 피에 젖은 발자국이 새붉었다. 


발목 깊이까지 오는 눈이었다.